일본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2050년, 초세계급(超世界級) 마에스트로로 선정되었다.
2029년 7월 29일,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출생. 아버지는 일본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였으며, 어머니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뮤지컬 배우였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으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주요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으며, 8세의 나이에 도쿄 영재 콘서트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열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특유의 까다로운 성격 탓에 학창 시절 교우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잦은 이사와 전학을 반복해야 했던 점도 한 몫하는 듯. 이른 시기에 활동을 중단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고등학교 졸업 정도 인정시험(대입 검정고시)을 통해 학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지휘자로 전향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며, 세계적으로 이룬 업적을 인정받아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현재는 프랑스에 정착하여 활동 중이다.
유아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도쿄대학교 피아노학과 교수였던 아버지에게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만 6세에 이미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도쿄대학교 산하 음악 영재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에 걸친 국내 및 국제 콩쿠르에서 매번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청소년 부문에서는 사실상 경쟁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클래식 피아노계의 유망주로 떠오르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4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만 16세[1]의 나이로 일본인 최초이자 세계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본선 1차에서 연주한 쇼팽 에튀드 ‘겨울바람’(Op. 25 No. 11)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동시대 최고의 연주"로 손꼽히며,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심사 위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콘체르토 최고 연주상까지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수상 직후, 콩쿠르 무대에서 선보였던 곡들을 모아 놓은 우승 실황 앨범이 발매되었으며, 이는 클래식 애호가들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다. #
그러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그는 같은 해 손목 부상으로 인해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손목 부상으로 인해 피아니스트 활동을 중단한 지 2년 만에, 그는 뜻밖의 기회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된다. 지휘자의 부재로 인해 급하게 대체자를 찾고 있던 한 대학 합창단의 지도를 맡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자로서. 직접 연주하지 않고도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휘라는 역할이 그에게는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한다.[2]
비록 작은 규모의 대학 발표회였지만,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성장을 이룬 합창단과 무대 뒤로 사라졌던 어린 지휘자의 등장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평론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후 크고 작은 연주회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남다른 해석력과 끊임없는 발전으로 매번 청중 전원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냈으며, 지휘를 시작한 지 단 1년 만에 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단 6개월 만에 도쿄 필의 최연소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음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처럼 짧은 기간 안에 이룬 성취는 이례적인 사례로, 악단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그의 경력에 대한 논란과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이 도쿄 필의 전성기였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도쿄 필은 현대 음악과 미디어 협업에 집중하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었으나, 모치즈키 유리는 순수 무대 위주의 공연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개편하고, 등한시되던 고전 음악을 다시 전면에 내세우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쿄 필을 떠난 후, 그는 자신의 악단을 창단하여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개최했다. 그의 연주는 가는 곳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아이콘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영향력과 성취를 인정받아 모치즈키 유리는 2050년에 초세계급 마에스트로로 선정되었다.
이 시기의 모치즈키 유리는 도쿄 필 최연소 상임지휘자, 초세계급 마에스트로라는 독보적인 이력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현재는 어머니의 조국인 프랑스[3]에 정착하여 악단 활동보다는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고 있다.
모치즈키 유리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때와 지휘자로 활동할 때의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쇼팽, 리스트, 드뷔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4] 그런 만큼 탄탄한 기본기와 화려한 테크닉, 그리고 낭만적인 표현력을 겸비한 것이 특징이다. 한 번 들은 곡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오히려 이런 성향이 연주에 고착될까 우려해 동시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거의 듣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또한, 악보에 표기된 작은 디테일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구현하는 점이 그의 연주의 큰 강점으로 꼽힌다.
반면, 그의 지휘 스타일은 본인의 해석을 중시하는 편으로, 같은 곡이라도 전혀 새로운 곡처럼 들리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도쿄 필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이러한 성향이 비교적 덜 드러났으나 (그는 애초에 고전~낭만 음악으로 주목받은 지휘자였다), 개인 악단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본인의 해석을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스타일로 변화했다. 또한, 절제되고 깔끔했던 초기 퍼포먼스와 달리 점차 화려한 연출[5]을 가미한 공연을 선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클래식계에서는 다양한 평가가 뒤따랐다. 보수적인 청중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그의 스타일이 전통적인 해석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비판이 있었으나, 클래식 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결국, 그는 초세계급 마에스트로라는 타이틀을 거머쥠으로써 논란을 스스로 종결지었다.
다만 모치즈키 유리와 함께 작업해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그렇게 좋지 않은데, 그의 성격이 고집스럽고 깐깐한 탓인 듯하다. 본인의 기준에 미치지 않는 연주를 들었을 때는 막말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고.
한편, 피아니스트로 복귀한 후의 연주 스타일은 이전보다 한층 자유로워졌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치즈키 유리/음반 문서를 확인하십시오.